내가 기억하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허탈한 가슴을 부여잡고 학교 앞 교회에 달려가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예, 주님.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없어도 제 유일한 소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그 무거웠던 짐이 작아지고 위태로웠던 소망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예배는 내가 편안하고 하는 일이 술술 잘 풀리기에 감사해서 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칠흑같이 캄캄한 생의 어느 순간에 처했을지라도 놓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슬픔과 고통이 나를 절망의 나락으로 얼마 동안은 빠지게 할지 몰라도, 기쁨과 소망은 여전히 내 앞에 남아 있다. 내가 예배를 선택하는 순간 나는 그것을 보게 된다.
여기저기서 '예배하는 삶, 삶으로 드리는 예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과연 예배자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일까? 여기, 나누고 싶은 찬양 가사가 하나 있다. "I choose to worship"이란 찬양이다.당신의 궁정 밖에 우두커니 서서이 사람이 겪고 있는 삶의 길이 순탄치는 않은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궁정 안에 들어가 기쁨을 누리고 있지만, 지금 이 사람은 그 입구에 서성이며 갈등하고 있다. 수많은 방해들이 그의 앞을 막아서기도 한다. 잊고 있던 시린 상처와 쓴 뿌리가 다시 들고 일어나고, 인격이 아닌 능력으로 판단받는 삭막한 인간 사회가 눈앞을 가리기도 한다.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 순간을 그냥 지나치고 내 갈 길을 갈 수도 있었지요
입을 다물고 찬양을 그쳐 버릴 수도 있었고
내 마음을 드리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에라 모르겠다. 빨리 내 갈 길이나 가자. 여기서 머뭇대다가는 나만 더 낙오될 뿐이지.'
모질게 마음을 먹고 그 뜰 앞을 지나치려 하지만 왠지 그는 다시 고민에 빠진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내 인생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그는 자기가 처한 상황의 어려움과 고통의 답을 모두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님을 선택하려고 한다. 상실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 편을 택했을 때 기쁨을 누렸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주님의 궁정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주의 궁정 안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지 않으렵니다
이 순간을 놓친 채 내 맘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
내가 어찌 벙어리처럼 주님 찬양하기를 그치겠습니까?
내 마음 주께 드립니다.
(후렴)
당신을 예배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마음 알게 되도록
주님 알기 원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오 주님, 경배합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린 이들은 더 이상 뒤돌아서 갈 수 없다. 주님 전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귀한 것임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영원히 주님의 전에 거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 된다. 진정한 예배자는 입술이 아닌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으로 이루어진다.
지금 나는 다시 한 번 도전한다.
주님을 경배하기로 '결정'하자고
매 순간 망설이지 말고 그 궁정으로 들어가겠다고
진정한 예배자가 누구인지 기억하면서 나의 있는 자리에서 그 지경을 넓혀 가기를!
"이 순간 당신을 예배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청년 바보의사, 그가 사랑한 것들 - 안수현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라디아서 6:9-10
하나님께서 다시 하라고 하신다. 하지만 아직은 힘이 없다. 아직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나 보다. 기다리자. 예수를 만난 이들은 주의 이름이라는 권능으로 담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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